최근에 한 외국 땅고 친구가 한국을 다녀갔다. 그는 한국에 여러 번 방문해서 비교적 한국을 잘 아는 친구이다. 여행이 끝나고 그가 말하기를 이곳의 땅고가 어쩐지 퇴보한 것 같다고 했다. 플로어 위에서 춤은 덜 추고…
Posted by Leonel Hung-Yut Chen on Monday, January 16, 2023
최근에 한 외국 땅고 친구가 한국을 다녀갔다. 그는 한국에 여러 번 방문해서 비교적 한국을 잘 아는 친구이다. 여행이 끝나고 그가 말하기를 이곳의 땅고가 어쩐지 퇴보한 것 같다고 했다. 플로어 위에서 춤은 덜 추고 안는 것에 더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예전에 갔었던 유럽의 한 땅고 마라톤이 생각났다. 하루 24시간을 3일 동안 밤낮없이 달리는 진짜 마라톤이었는데, 시간이 길다 보니 만나는 파트너마다 최소한 3 딴따를 연속해서 췄다. 한 파트너와 아브라소도 풀지 않고 40분 이상을 춘 것이다. 이 40분간의 포옹은 주말 내내 쌓여 결과적으로 마치 하나의 긴 포옹을 하고 온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 경험을 즐기지 않았다고는 못하겠다. 사실 즐겼다. 좋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그건 마치, 부작용이나 불법성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는 약에 취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해한다. 포옹은 음악이나 따뜻한 누룽지, 테라피가 할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니까. 내 고양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 고양이는 제일 정직한 동물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원하는 때에 요구한다. 그리고 그 어느것보다도, 제일 좋아하는 냄새나는 사료보다도 더 내 고양이가 원하는 건 자신을 만져주는 것이다. 쓰다듬고, 긁어주고, 얼러주고, 안아주는 것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땅고에서도 움직임이 줄어들면서 안아주는 것 자체에 가깝게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사람 간의 접촉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땅고가 아니면 한국 어디가서 이런 포옹을 할 수 있을까? (사실 또 한 곳이 있다. 바차타를 추면 된다. 심지어 요즘에는 “센슈얼 바차타”도 생겼다. 기존 바차타가 충분히 센슈얼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포옹하고 서로를 느끼는 데 치중해 “춤”이 줄어드는 현상은 과연 나쁜 걸까? 나는 몇 가지 위험 요소가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땅고를 가르치는 나에게 재앙이다. 모두가 가만히 서서 안고만 있으면, 땅고 수업을 들을 일이 없어질 것이고, 나는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할 것이다.
또 누가 손해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플로어에서 움직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다. 고속도로 위에서 차 두 대가 정차하고 운전자들이 내려서 포옹을 시작한다면, 아마 다른 운전자들은 답답해 미칠 것이다. 차를 멈춘 두 운전자들이 서로에게 집중해 영혼을 치유하면 할수록, 다른 운전자들은 더욱 더 짜증이 날 것이다. 미국이라면, “차라리 방을 잡아라!”라고 소리치겠지.
또 누가 손해를 볼까? 아마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 모두일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까지 한국은 정말 좋은 평판을 쌓아 왔다. 모두가 한국에 와서 춤을 추고 싶어한다.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이봐! 바로 우리가 아시아의 땅고 수도라구!!” 왜? 우리가 춤을 잘 추니까, 그리고 그게 쉽지 않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춤보다 서로 안고 느끼는 것을 더 선호한다면?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 밀롱가에서도 할 수 있는 포옹을 하기 위해서 비행기값을 들여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평판과 자리를 노리는 다른 나라들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껏 쌓아온 것들을 현재 상황에 안주해서 망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