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춤과 밀롱가 춤은 다르다.”

나는 최근 이 말을 꽤 여러번 들었다. 아마도 사실이지 않을까? 많은 땅고 선생님들이 대회준비반 수업을 하고 있다. 만약 이 둘이 같은 것이라면 대회준비반이 굳이 필요 없을…

Posted by Leonel Hung-Yut Chen on Monday, April 3, 2023

“대회 춤과 밀롱가 춤은 다르다.”

나는 최근 이 말을 꽤 여러번 들었다. 아마도 사실이지 않을까? 많은 땅고 선생님들이 대회준비반 수업을 하고 있다. 만약 이 둘이 같은 것이라면 대회준비반이 굳이 필요 없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 우리의 춤을 대회의 성격에 맞추기 위한 수업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밀롱가와 대회의 다른점이 뭔지가 궁금해진다. 어떻게 춤을 다르게 추게 만들까? 한 방식을 다른 곳에서 사용하면 문제가 될까? 이 둘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춤의 방식만 비교해서는 안된다. 먼저 대회와 밀롱가가 다른 문화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밀롱가 문화는 뭘까? 내가 알기로, 부산 사람들은 돼지 국밥에 진심이다. 타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디테일하고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다고 한다. 경험 많은 밀롱게로들 역시 땅고 음악과 파트너에 대해 마찬가지이다. 음악이 마음에 드는 경우에만 춤을 출 파트너를 찾는다. 만약 그 음악에 맞는 적당한 파트너를 못 찾았거나 이미 플로어가 꽉 차 있다면 차라리 그냥 앉아서 그 딴다를 흘려보낸다. 그들이 춤을 즐기는 방식은 먼저 자신의 취향에 솔직해지고, 그 취향에 맞는 이상적인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풀딴을 추는 경우는 드물고, 때로는 까다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상대적으로, 땅고를 시작하고 처음 몇년은 춤을 추고싶은 욕구가 우선이 된다. 돼지국밥이라면 가리지 않고 일단 다 먹고 보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법을 익히면 차츰 취향과 기호가 무르익는다. 땅고에서 “꼬라손 (심장, 또는 마음)”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아마도 춤을 추는 횟수는 줄겠지만, 각 딴다가 주는 만족도는 훨씬 깊어지게 된다.

그럼 밀롱게로들이 춤을 추지 않는 동안에는 무엇을 할까? 일종의 여유를 즐긴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음식을 먹거나,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그냥 사람들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밀롱가의 음악이 우리 기분에 스며들게 하고, 눈앞의 춤추는 사람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흡수한다. 우리는 모두 춤을 추고 싶어 한다. 하지만 땅고를 느끼는데 있어 춤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최고의 땅고 음악이 흐르는 한, 밀롱가에서 계속 춤을 추지 않아도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솔직히 이런 밀롱가 문화는 한국인들에게 좀 낯설고 불편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호불호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더하다. 처음 보는 사람과 자유롭게 어울리면서 그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몹시 어색하다. 좋든 싫든간에, 우리는 조직적이고 압박감이 가득한 경쟁의 구도에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대회는 정확한 규칙이 세워져 있고, 목표와 보상도 확실하다. 그래서 결국 명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선호하는 음악을 식별하거나, 각 딴다에 맞는 파트너를 찾거나, 피하고 싶은 관계를 탐색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그저 대회 시간에 맞춰 등장해서 최선을 다해 내 기량을 보여주면 된다. 비록 이기지 못하더라도, 수개월의 훈련으로 발전이라는 결과를 이미 얻었다. 또한 많은 관객 앞에서 힘든 연습의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다. 만약 수상을 한다면,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타이틀을 영원히 남길 수 있게 된다.

이쯤되면 밀롱가와 대회가 각자 다른 방식의 춤을 야기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밀롱가는 개인의 취향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춤의 스타일도 다양해진다. 대회는 통제되고 표준화된 환경에서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춤의 스타일이 비슷해진다. 댄스스포츠 인터네셔널 스쿨의 경우를 보면 모든 춤에 정확한 테크닉과 사용할 수 있는 피겨가 구체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땅고 대회는 아직 그렇게 극단적으로 가지 않았지만, 춤의 스타일이 하나로 모이는 경향은 분명해 보인다.

LOD 역시 밀롱가와 대회에서 매우 다르게 작용한다. 밀롱가에서는 론다가 잘 돌아가려면, 플로어에 선 리더들이 서로에 대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옆에 있는 커플들의 위치를 예리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동시에 진행하고 하나의 그룹처럼 론다의 흐름을 만들 수 있다. 마치 새 떼나 물고기 떼가 하듯이 말이다. 이런 협력 없이는 춤추는 공간은 서로 마지못해 공유하는 혼잡한 구덩이가 되고 말 것이다. 빠져나갈 곳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춤은 습관적인 리바운드와 히로의 연속으로 변해갈 것이다.

하지만 대회에서 LOD를 유지하는 것은 보람있는 협업이라기 보다는 적응해야 하는 규칙이자 춤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대회에서의 목표가 남보다 돋보이고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중심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따라서 잘 흐르는 론다를 유지하는 것보다 자신의 움직임, 음악적 해석, 보여지는 모습에 더 우선순위를 둔다. 대회를 진지하게 참가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안하면 바보다.

보다시피 밀롱가와 대회는 거의 서로 관련성이 없다. 서로 춤추는 방식만 다른 게 아니다. 나아가 서로 반대되는 습관과 태도를 만들어 낸다. 대회를 위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밀롱가에서 대회에 참가한 것처럼 춤을 추거나 행동하는 것 역시 비생산적이고 터무니 없어 보인다. 심하면 본의아니게 민폐가 될 수도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런 양분화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모든 땅고에 관련된 것들 역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온다. 그곳에서도 수많은 젊은 세대들이 대회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에게 문디알은 심각한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날 탈출구이다. 그들에게 일과 여행, 외화를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직면한 경제적 문제 앞에서 밀롱가의 문화를 보존하고 알리는 것은 더이상 우선순위가 아니게 되었다. 그에 비해 한국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이니 이 밀롱가 문화를 더 잘 키워낼 조건을 갖춘 것이 아닐까?

김치는 단순한 “발효된 저장 배추”가 아니지 않은가. 김치는 특유의 문화와 정신을 담고 있는 고유명사이다. 같은 이유로, 밀롱가 역시 단순한 “땅고 댄스 파티”가 아니다. 밀롱가는 수업이나 쁘락띠까, 대회에서 찾을 수 없는 땅고의 정수를 제공하는 곳이다. 밀롱가에서 무르익은 댄서들의 춤은 다른 어디에서도 복제할 수 없는 특별한 맛이 있다. 나는 땅고에 열정적인 모든 이들이 이 맛을 찾기 위해 더 노력을 기울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분명 그 과정에서 숨겨진 귀한 보석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