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고 무그레 >

2004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다시 만난 마에스트로 고(故) 가비또(Carlos Gavito)의 공연을 봤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수술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던 그는 다른 사람의…

Posted by Florencia Hwayi Han on Sunday, June 18, 2023

2004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다시 만난 마에스트로 고(故) 가비또(Carlos Gavito)의 공연을 봤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수술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던 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고 걸어야 할 정도였다. 포에버 땅고(Forever Tango) 공연에서 보여줬던 풍채는 간 곳 없었다. 파트너와 체중을 서로 맞대고 의지하는 아삘라도(Apilado)로 춤을 췄기 때문에 그나마 공연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의 춤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별 거 없었다. 파트너를 안고 몇 걸음 걷고 그의 특유의 ㅅ자 모양의 빠우사를 하고 음악을 흘려보내다가 몇 개의 작은 오초를 하고 또 음악을 흘려보내고….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춤춰 내고 있었다. 그가 살아온 삶이 몸을 타고 흘러내려 홀 안을 가득 채우는 게 느껴졌다. 그걸 보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넋을 잃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 공연을 봤다. 나는 그때 가비또가 가진 에너지가 엄청 크고 대단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비또는 그다음 해에 돌아가셨다.

200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방문했을 때는 고 뽀데스따(Alberto Podesta)의 노래를 듣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 80세를 훌쩍 넘은 뽀데스따 할아버지의 노래는 사실 잘 부른다고 할 수 없었다. 이미 성대가 노쇠해서 음이 잘 올라가지도 않았고, 옆에서 해주는 기타 반주를 잘 따라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역시 마에스트로의 에너지는 대단하구나,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 감동은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에너지’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뽀데스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 두 노장은 왜 나를 그렇게 울렸을까? 도대체 그 에너지는 뭐였을까? 그냥 에너지가 ‘크다’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이 뭔지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인은 ‘한’의 민족이다. 이 ‘한’이란 정서는 우리나라에만 있다. 다른 나라는 이런 개념이 없다. 분노, 원한, 복수 등의 의미는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한’은 그것과 다른 무엇이다. 중국계 나라의 경우 같은 단어를 쓰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한’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한’은 가장 한국적인 슬픔의 정서이다. 외래의 침략이 잦았던 우리나라는 불안과 위축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또한 유교사상의 계층의식, 사대부의 민중 수탈 등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힘들고 고단했다.

물론 이런 어려움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그렇다면 한국적 ‘한’이 특별히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은 이 어려움에 대한 분노와 원한, 좌절을 다르게 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냥 체념하고 무력해지지 않고, 복수를 향한 폭력으로 치닫지 않고, 다만 이 한을 승화시켜 풀기로 한 것이다. 민요와 판소리를 통해, 종교를 통해, 해학을 통해 풀어내었다. 힘들면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 그래서 ‘한’에는 단지 고달픈 삶에 대한 고충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풀어내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함께 담겨 있다.

땅고에는 무그레(Mugre)가 있다.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무그레는 직역하면 ‘dirt(진흙)’이라는 뜻이다. 뭔가 더러운 걸 의미한다. 더티한 땅고? 영화 더티댄싱이 생각난다. 더티하다고 하니까 어쩐지 성적으로 난잡한 것이 떠올랐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더티하다는 게 이중적인 의미가 있구나 싶었었다. 땅고의 무그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한의 정서를 외국인에게 이해하도록 설명하기란 쉽지 않듯이, 땅고의 무그레 역시 외국인인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오묘하게 어려운 정서이다. 하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역경과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 빠져나오려는 의지’

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내가 처음에 아르헨티나에 갔을 때 왠지 친숙하고 우리나라 문화와 비슷하다고 느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한’과 같은 ‘무그레’ 정서가 있는 것이다.

땅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이민지들과 하층민에게서 탄생한 춤이다. 그들의 삶 역시 힘들고 고달프고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처지였다. 억울함과 분노, 무력감이 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고단함을 춤으로 풀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의 살아내려는 의지가 춤의 성격이 되었다. 훗날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고국인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가 상류사회에서 즐기는 춤이 되었을지언정, 그 안에 녹아있는 땅고의 에센스는 고스란히 남았다.

팬팬데믹 직후 방문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밀롱가에서 나는 나이 많은 밀롱게로들에게 이 ‘무그레’란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저 사람은 무그레가 없어.” “그 춤에는 무그레가 있어.” 그렇다. 뽀르떼뇨들이 인정하는 땅고에는 이 무그레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다.

땅고는 처음부터 쉬운 춤이 아니다. 생판 남인 두 사람이 만나서 호흡을 맞춘다? 그것도 몸을 붙이고 한 사람인 것처럼 움직인다? 당연히 잘 될 리가 없다. 춤이 삐거덕 거리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땅고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이 무그레 때문이다. 둘이 잘 안 맞을 게 당연한 사실을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맞춰가려는 노력이 바로 땅고이니까. 그래서 완벽한 땅고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완벽하지 않아야 땅고다. 완벽하지 않고 에러가 많을수록 무그레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요즘 춤의 성향을 보면 어쩐지 완벽을 향해 가려고 하는 게 대세인 듯하다. 한 러시아의 에세나리오 댄서는 정말 아름답고 완벽한 춤을 선보였다. 어쩜 저렇게 몸을 예쁘게 쓰는지 감탄이 나올 정도였고,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 감정적인 표현도 풍부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밀롱게로들은 고개를 돌렸다. 마치 저건 땅고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왜? 너무 완벽하기 때문에. 완벽한 것에는 무그레가 없고, 무그레가 없으면 땅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무그레가 있는 진짜 땅고를 출 수 있을까? 무그레는 무언가 흐트러지고 망가지고 실수했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 해결하려는 의지이다. 그러려면 먼저 실수와 에러가 있어야 한다. 땅고는 즉흥성이 바로 그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즉흥에는 당연히 여러 변수와 에러가 존재한다.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완벽한 척 포장하는 대신에, 자신의 춤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 둘의 춤이 완전히 불안정한 즉흥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전에 봤던 고 가비또와 뽀데스따의 공연이 그토록 감동적이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그들의 공연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불태웠다. 그 안에는 엄청난 무그레가, 엄청난 땅고가 존재했다. 완벽한 것에는 감탄하게 되지만, 감동은 언제나 그런 무그레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