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제가 히로를 할 때 혹시 미는지 좀 봐주시겠어요?”
한 학생의 부탁에 간단한 메디오 히로를 해 보았는데 별로 이상한 점이 없었다.
“글쎄, 괜찮은 것 같은데… 왜? 언제 미는 것 같은데?”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저보고 민다고 하더라구요.”
“누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는데? 밀롱가에서, 아니면 쁘락에서?”
“밀롱가에서요. 한곡 끝나고 나서 저한테 물어보더라구요. 왜 히로 하면서 미냐구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구요. 그래서 다른 사람하고 추면서 물어봤는데 그 분은 또 안민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언제 미는 건지 모르겠어서요.”
그녀와 상담을 하면서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들은 이후 춤을 출 때마다 내가 혹시 밀고 있나 걱정을 하게 됐다. 그 날 밀롱가에서 뿐 아니라 며칠이 지난 오늘 나에게 상담을 하기까지 쭈욱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밀롱가에서 섣부르게 춤에 대한 평을 하는 게 위험한 이유이다.
보통 상대방의 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상대방을 도와주고 싶은 선의에서이다. 두 번째는 상대방을 깎아내려 자신이 우월해 보이고 싶은 과시욕이다. 춤을 추면서 동작을 제대로 할 때까지 반복해서 시킨다거나 말로 이렇게 해야지 하고 충고하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상대를 추켜세우기 위한 칭찬으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 중 세 번째의 경우는 괜찮은 것 아니냐고 반문 할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곡과 곡 사이에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 준답시고 “춤이 전보다 좋아지셨네요.” 하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동안 얼굴만 알던 사람과 처음으로 춤을 추게 되었다. 첫 곡이 끝나자 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춤을 너무 잘 추세요. 마치 깃털 같아요.”
두 번째 곡을 추면서 내 머릿속은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첫 곡은 잘 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춰 보니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쩌지? 깃털 같다는 말은 내 발이 너무 가벼워서 잘 안 느껴진다는 뜻인가?’
그 이후로 그 사람과 춤을 출 때마다 나는 깃털 같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건 은근한 부담감이었다. 그리고 밀롱가에서 춤에 대한 평가는 칭찬조차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쁘락띠까에서는 서로 춤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선생으로서의 나조차도 쁘락을 운영할 때 누군가의 춤에 쉽게 참견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집중해서 연습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연습은 단계가 있고, 우리는 한 번에 한 가지 이상 집중해서 연습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체중이 있는 발로 땅을 미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어깨가 올라간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를 하는 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조심해야 한다. 상대가 피드백을 요구할 때에 한해서만 도움을 줄 수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면서 연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피드백을 주려는 이유는 상대를 아끼는 마음에, 혹은 두 사람의 춤의 퀄리티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좀 더 정확한 동작을 하도록 도와주려는 마음 보다는 나 자신의 연습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어떤 상황에서도 땅을 잘 딛고 있는 중심축이라던가, 몸을 좀 더 풍부하게 쓰는 것, 집중을 잃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는 것 등등 말이다.
대부분 밀롱가에서 춤을 추면서 상대의 춤을 지적하는 경우는 사실 자신이 상대에게 맞출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춤을 잘 춘다는 것은 어떠한 상대를 만나더라도 그 사람의 스타일이나 여러 가지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진짜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은 절대 상대의 춤에 대해 지적질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밀롱가에서나 쁘락띠까에서 누구든지 내 춤에 대해 지적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내 춤에 뭔가 문제가 있나 걱정하기 보다는 ‘아,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래야 밀롱가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주체적으로 땅고를 즐길 수 있다.
물론, 나 자신의 춤을 발전시키는 것은 끊임없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 스스로가 느끼고 원해서 발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에게 나는 너무 가볍고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 무겁다. 어느 누구의 기준에 맞출 것인가? 결국 완벽한 테크닉이나 완벽한 춤은 없다. 다만 나와 좀 더 잘 맞는 상대가 있고 좀 덜 맞는 상대가 있을 뿐이다. 덜 맞는 상대라 해서 춤을 즐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원치 않는 지적을 당하고 의기소침해진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즐기는 것이다. 지금 행복하기 위해 땅고를 추는 것이다. 발전은 내일 해도 된다. 어차피 우리는 남은 평생 이 춤을 출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