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고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 스스로를 땅고 중년이라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더 이상 매일 땅고 동영상을 보지 않는다. 주 5빠 6빠를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했던 날들이 그립긴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만족스럽다. 지금은 내 마음이 동할 때 밀롱가를 가서 나에게 진짜 의미 있는 딴다만 추는 게 좋다. 아무 부담이나 의무도 없이 오로지 내 열정과 필요한 만큼의 만족을 따르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춤을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매료된다. 춤을 출 때 드러나는 그들의 얼굴표정과 몸의 습관 같은 것 말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왜 춤을 추는지, 그 안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 땅고는 우리의 내면을 모두가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과도 같다. 땅고를 춘다는 건 열어놓는다는 것이다. 아브라소를 하는 순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된다. 한 번도 말을 섞어보지도 않고 개인적인 관계가 없어도 단순히 그들의 춤을 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밀롱가에 앉아 있으면 절대 지루하지 않다. 내 주위에는 언제나 숨겨진 삶의 이야기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내 자신을 보여줘야 하는 순간이 올 때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지금의 교황이자 아르헨티나인인 프란시스 교황이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아르헨티나인들이 어떻게 자살을 하는지 알아요? 자아도취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는 겁니다.”
아르헨티나인들로부터 자기중심적이 되는 법을 배운 것은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홍콩에서 태어나고 아시아식 교육을 받은 내게 그것은 완전 반대인 개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겸손한 것과 예의바른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었다. 다행인 것은 이런 아시아식 교육이 땅고에서도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예의는 내 자기중심적 태도를 조율하기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이다. 땅고를 추는데 있어서 이기심과 예절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를 가장 눈부시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댄서들은 모두 누구보다 강한 자존감을 보였지만, 동시에 적절한 존중도 함께 보여줬다. 자신들의 파트너 뿐 아니라 음악, 댄스 플로어,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 말이다.
땅고를 가르치는 것 역시 매우 매력적이다. 테크닉을 지도하는 것만큼 마음을 다지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왜 움직임을 만들고 행동하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을 즐긴다. 그리고 그들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학생들이 춤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 뿐 아니라 나아가 스스로의 지식과 자신감을 쌓아가는 것을 볼 때가 가장 보람 있다. 그래서 땅고 선생님은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때로는 코치, 심리 상담가, 심지어 영적 지도자(구루)가 되어주어야 한다.
사진의 필터처럼, 땅고는 삶에 컬러를 입히고 마법처럼 조화를 부린다. 나는 지금까지 땅고가 사람들의 자신감과 경험, 열정을 끌어내는 것을 수없이 봐 왔다. 춤을 더 출수록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된다. 물론, 때로는 실망도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서 땅고는 우리를 좌절의 순간으로부터 꺼내 줄 것이다.
한국에서 밀롱가와 수업이 중단된 지 6주가 지났다. 지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렇게 오랫동안 땅고가 멈춘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자리를 요리나 글쓰기, 연습, 독서, 뉴스 청취, 넷플릭스 등으로 메꿔보려고 노력했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딱히 불만은 없다. 전 세계적인 혼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직 건강하게 잘 생활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할 뿐이다.
땅고의 연결은 바이러스의 분열을 의미한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어도 결국에는 땅고가 승리할 것을 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훈련과 인내, 믿음이 필요하다. 이 바이러스를 함께 이겨낼 수 있도록 나는 나의 역할을 잘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땅고 중년시기를 다시 지속할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